
어머니의 신발장은 언제나 묵직했습니다.
어두운 검은색 효도화 하나.
때가 타도 티가 나지 않는 짙은 회색 운동화 하나.
조금 튀어봐야 갈색 컴포트화가 전부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밝은색을 권하면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늙은이가 주책맞게 무슨 그런 걸 신노."
그러던 지난주 봄날이었습니다.
딸의 손을 잡고 시장 골목을 지나던 어머니가
쇼윈도 앞에서 슬그머니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진열대 한가운데에 놓인 작은 신발 한 켤레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봄날의 개나리를 통째로 물들여 놓은 듯한,
아주 쨍하고 화사한 노란색 운동화였습니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그 신발을 쳐다보았습니다.
멋쩍은 듯 가방끈만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바라보시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앞장서 걸어가셨습니다.
그 눈빛을 눈치챈 딸이 주말에 슬그머니 상자를 들이밀었습니다.
"엄마, 이거 신고 나랑 산책 가자."
상자를 열자마자 노란 빛이 거실 가득 쏟아지는 것 같았습니다.어머니는 손을 저으며 부끄러워하셨습니다.
"아이고야, 동네 사람들이 보면 비웃는다!"
하지만 못 이기는 척 신발에 발을 쑥 밀어 넣으셨습니다.
찍찍이를 단단히 붙이고 거실을 몇 걸음 걸어보셨습니다.
바닥이 폭신폭신하다며 엷은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방에서 나오던 아들과 며느리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놀림감이 될까 봐 어머니는 얼른 신발을 벗으려 하셨습니다.
그때 뒤따라 나오던 아홉 살 손자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습니다.
"와! 할머니 발에 노란 나비가 앉았다! 진짜 예쁘다!"
아들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엄마, 십 년은 더 젊어 보여요. 진작 이런 것 좀 신지!"
며느리는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파트 단지 안 산책로로 나서셨습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노란색 신발 코가 가볍게 들썩였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볼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지만,
만나는 이웃들마다 한마디씩 다정한 인사를 건넸습니다.
"아이고, 찬이 어머님 신발에 봄이 왔네, 봄!"
"어디 좋은 데 놀러 가시나 봐요? 신발이 너무 멋져요!"
비웃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노란 신발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얼굴마다
환한 미소가 물결처럼 번져나갔습니다.
어머니는 비로소 고개를 똑바로 들고 어깨를 활짝 폈습니다.햇살이 쏟아지는 아파트 산책로를 따라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멀리, 더 가볍게 걸으셨습니다.
내려다본 발끝에서는 노란 나비 두 마리가
사뿐사뿐 춤을 추며 앞장서 가고 있었습니다.
한바탕 신나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신 저녁,
어머니는 신발장의 가장 잘 보이는 맨 앞줄 자리에
노란 운동화를 나란히 올려두셨습니다.
늘 어두운 신발들 뒤편으로 숨기듯 밀어 넣던 손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실에 모여 있는 가족들을 향해 눈을 찡긋하셨습니다.
"내일은 주방에 까는 발매트도 노란색으로 싹 바꾸자꾸나."
그날 밤, 어머니의 신발장 문 틈새로
지우지 못할 화사한 봄볕이 밤새도록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온 가족의 입가에 벙글벙글 따스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 제 마음속에도 노란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난 것처럼 몽글몽글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이라는 무게에 눌려 스스로 화사함을 포기하고 살았던 어머니들에게,
노란 운동화는 단순한 신발이 아니라 잊고 지냈던 '설렘' 그 자체였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오늘도 무난하다는 이유로, 혹은 남부끄럽다는 이유로
어둡고 칙칙한 옷과 신발만 고집하고 계신 시니어 독자분이 계신가요?
내일은 가장 마음에 드는 화사하고 밝은 색깔의 옷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서보세요.
당당하게 걷는 당신의 밝은 걸음걸이가 주위 모든 사람의 하루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 독자분들께 조심스럽게 행동을 제안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부모님의 신발장을 한번 가만히 열어보세요.그리고 부모님의 손을 잡고 매장으로 가 가장 눈부시고 화사한 색깔의 운동화를 한 켤레 선물해 드려 보세요.
부모님의 발끝에서 시작될 새로운 봄날의 청춘을 다 함께 응원해 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 이 글은 픽션입니다. [ 노후 설계 클리닉 (운영자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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